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쉴레이만 1세 (문단 편집) ==== 헝가리 문제 ==== >나의 주군께서는 재물이 필요하지 않다. >---- >ㅡ 이브라힘 파샤가 오스트리아 사절에게 1530년 합스부르크는 오스만의 빈 포위 실패 이후 반격에 나섰으나 오스만의 선방으로 실패로 돌아갔고 이에 대한 반격으로 1532년 4월 25일, 쉴레이만이 이끄는 10만 대군은 빈을 향해 재차 북진하였다. 합스부르크 측은 카를 5세의 동생이자 오스트리아 대공인 페르디난트의 헝가리 왕위 즉위를 인정하는 대가로 무려 10만 두카트를 제시했으나 쉴레이만은 단칼에 거절하였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에스파냐의 국왕은 오래 전부터 터키인들과 겨루고 싶다고 말해왔다. 신의 은총으로 짐은 군대를 이끌고 그를 만나러 가노니, 자신이 생각하기에 스스로 크다고 여기면 전쟁터에서 나를 기다리고, 그러면 신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만일 그가 나를 만나고 싶어하지 않는다면 나의 제국으로 조공을 보내도록 하라. 그러나 호기롭게 출발한 2차 침공에서도 상황은 녹록지 않았다. 지난 공성에서 교훈을 얻은 카를 5세와 페르디난트 모두 오스만의 침공에 대비해 단단히 방어태세를 갖춘 상황이었던 것이다. 빈으로 진격하던 도중 술탄의 군대는 헝가리의 작은 도시 [[쾨세그]]에서 [[크로아티아]]인 수비대장 니콜라 유리시치가 지휘하는 수비대의 결사적인 저항에 발목이 붙잡혔고 빈에는 카를 본인이 지휘하는 8만의 대군이 모여 있었으며 1차 빈 포위 때와 마찬가지로 궂은 날씨와 길어진 보급선으로 인해 오스만군은 고전하던 중이었다. 결국 쉴레이만은 2차 침공도 포기하고 수도 코스탄티니예로 돌아갔다. 2차 침공의 실패 이후 합스부르크를 쓰러뜨릴 수 없다고 생각한 쉴레이만은 결국 1533년 합스부르크 왕가와 평화조약을 맺으면서 페르디난트가 야노시 1세를 헝가리 왕으로 인정하는 대신 페르디난트가 점유하고 있던 서부와 북부 헝가리 및 크로아티아에 대한 합스부르크의 점유를 인정했다. 하지만 평화조약을 맺은 이후로도 페르디난트는 계속해서 헝가리 전역 수복을 노렸고 결국 1538년 압력을 받은 야노시 1세는 후사 없이 죽을 경우 헝가리 왕위를 페르디난트에게 넘기기로 합의했다. 야노시는 그 당시까지 자식이 있기는 커녕 결혼도 하지 않은 상태였고 페르디난트는 얼씨구나 하고 좋아하고 있었는데... 페르디난트와 조약을 맺은 그 다음해 야노시 1세는 폴란드 국왕 [[지그문트 1세]]의 딸 이사벨라와 결혼했고, 결혼을 한 바로 그 다음해에는 아들까지 보게 되었다! 그런데 아들이 태어난 지 9일 만에 야노시는 세상을 떠나버렸다!! 야노시 1세의 지지자들은 야노시의 아들인 이 갓난아기를 헝가리 왕 야노시 2세로 추대했으나 아직 아기인 고로 부더에서 정식으로 즉위식을 치루지 못했다. 이러다간 페르디난트에게 헝가리를 뺏겨버릴 것을 우려한 쉴레이만은 1541년 선왕 야노시 1세의 주군이자 야노시 2세의 보호자라는 명분으로 전적으로 헝가리를 침공해 [[오스만 헝가리|부더를 비롯한 중부 지역은 직할 영토로 합병]]했고 에르데이를 위시로 한 동부 지역은 [[동헝가리 왕국|오스만의 신하국]]으로서 야노시 1세의 미망인과 야노시 2세가 공동으로 다스릴 수 있게 해주었다. 오스만이 재빨리 헝가리를 세력권으로 편입하자 눈뜨고 코베인 페르디난트는 헝가리를 침공했으나 실패했고 3년 후인 1544년 다시 침공했으나 역시 실패로 끝났다. 결국 1547년 오스만과 합스부르크는 [[에디르네|아드리아노플]]에서 [[아드리아노플 조약|5년 기한의 휴전협정]]을 체결하면서 합스부르크는 나머지 헝가리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포기하고 오스만에게 매년 연공을 바치는 것으로 합의를 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쉴레이만은 카를 5세 및 페르디난트에게 제대로 굴욕을 주게 되는데 진정한 로마 제국의 황제는 자신 뿐이라는 이유로 엄연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였던 카를 5세는 그저 '''[[스페인 국왕]]'''이라는 직함으로, 차기 황위 계승이 유력한 페르디난트는 '''[[독일왕]]'''이라는 직함으로 협정을 체결하게 한 것이다. 그러면 쉴레이만 본인은? 쉴레이만 본인은 '''[[로마 황제]]'''라는 직함으로 협정을 체결했다. 한편 헝가리 동부 지역의 왕으로 임명된 야노시 2세를 대신해 섭정이 된 귀족 프라테르 지외르지는 오스만의 태세에 위협을 느끼고 페르디난트에게 힘을 실어주기로 결정해 1549년 자신이 섭정으로 있는 헝가리 동부 지역을 페르디난트에게 넘겨주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지외르지는 정식 국왕인 야노시 2세와 야노시의 모후 이사벨라와의 협의 없이 독단으로 왕국을 넘겨버렸고 이에 분노한 야노시의 모후는 지외르지와 내전을 벌였다. 그 와중에 합의에 따라 페르디난트의 군대가 동헝가리로 쳐들어왔고 내전에서 지외르지가 승기를 잡자 버티지 못한 야노시 2세와 이사벨라는 1551년 동헝가리 왕위를 포기하고 이사벨라의 친정인 폴란드로 망명했다. 그리고 반역을 주도한 죄르지는 페르디난트에게 암살당하며 토사구팽 당했다(...) 한편 죄르지의 배신에 격노한 쉴레이만은 1552년 동헝가리를 침공해 1555년까지 왕국의 대부분 지역에서 합스부르크군을 몰아냈고 폴란드로 망명한 야노시 2세를 다시 동헝가리 왕 및 에르데이 공작으로 복위시켰다.[* 1570년 야노시 2세는 헝가리 왕위라는 직함을 페르디난트 1세의 아들 [[막시밀리안 2세]]에게 양도하고 에르데이 공작으로만 칭하면서 [[동헝가리 왕국]]은 [[에르데이 공국]]으로 이름을 바꾸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1699년 [[카를로비츠 조약]]으로 헝가리 전역을 상실할 때까지 오스만은 헝가리를 자신들의 세력권으로 삼으며 수시때때로 [[합스부르크 제국]]을 위협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